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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이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이상한 종교가 생겨나고, 고달픈 백성들은 그런 종교에 빠져든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후한 말기에도 어김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쌀 다섯 말[斗]을 바치면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교리를 내세운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위세를 떨치더니, 다시 전래의 도교에다 민간신앙을 교묘하게 접목시킨 태평도(太平道)가 나타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갔다.
태평도의 교주 장각(張角)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청년이 된 장각은 어느 날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는 도인을 만났는데, 그 도인은 장각을 데리고 어떤 동굴로 들어가 천서(天書) 세 권을 주면서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것은 ‘태평요술’이라는 책인데, 여기에 적혀있는 것을 잘 익혀서 세상에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라. 만일 딴 뜻을 품을 때는 화를 면치 못하리라.”
그때부터 장각은 이 책을 보며 혼자서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장각을 무슨 도사처럼 떠받들었고, 그의 집에는 소문을 듣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로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그즈음, 중원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그의 마을에도 하루에 몇 사람씩 죽어갔다. 장각의 제자들은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 주술로 된 처방을 주었는데 대부분 신통하게 나았다. 백성들은 태평도만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겨 따르는 무리가 구름처럼 불어났고,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의 구세주였던 것이다.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장각은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두 아우를 장군으로 임명하는 한편,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군사 조직으로 편성했다. 전국에 36지부를 두고 큰 지부는 만 명이 넘는 군사를, 작은 지부도 수천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그의 군세(軍勢)는 일약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머리를 누런 수건으로 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도 모두 이를 본뜨게 되었고, 군기(軍旗)는 모두 황색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천하를 뒤엎을 거사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蒼天己死(창천기사)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黃天當立(황천당립) 마땅히 누런 하늘이 서리라
歲在甲子(세재갑자) 때는 바야흐로 갑자년이니
天下大吉(천하대길) 중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황건적이 만들어 퍼뜨린 노래이다. 그들의 군가인 셈이다. 세 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를 만큼 이들의 위세는 중원을 휩쓸었다. 장각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서 재산을 빼앗고, 복종해오는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약탈을 장려했다. 황건적은 가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 관리를 죽이고 양곡을 약탈하여 나누어 가졌다. 지방의 성주들은 매일 불안에 떨며 황성(皇城)에 구원을 요청했다. 지방에 있는 군사들은 기강도 형편없는 데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도저히 황건적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대규모의 관군을 편성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동탁 원소 조조 손견 등 후일 천하를 다투게 되는 군웅들은 관군의 이름으로 출전하게 되었고,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유비 관우 장비도 의병을 일으켜 황건적 토벌에 참여하게 된다. 황건적의 난은 이들 모두에게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기세 좋게 중원을 휩쓸던 황건적이 관군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총수 장각이 병을 얻어 갑자기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우인 장량 장보 형제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참패를 거듭하다 모두 전사하고 만다. 수뇌부가 붕괴되자 대세는 이미 기울어 주력부대들은 대부분 토벌되거나 흩어져 버렸고, 소규모 부대들만 남아서 국지적인 저항을 하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대규모의 농민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이처럼 쉽게 무너지고 만 것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갑자기 봉기한 점과 지도자 장각의 돌연한 병사(病死)에서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가족들을 거느린 채 싸워야 하는, 무기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농민군이 조정의 관군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은 베푸는 행위에서 다스리는 행위로 조직의 목표와 기능이 급격히 변질된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으레 그러하듯이 황건적도 처음에는 굶주리고 병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줌으로써 민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뒤엎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 살육을 자행하면서부터는 민심이 다시 돌아서버린 것이다. 민심이 따르지 않는 혁명이 실패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황건적이 전부 토벌되었어도 후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십상시라 불리는 환관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한(漢)의 4백 년 제업(帝業)도 안에서부터, 또 위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장각은 왕조 말기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갈 지도자로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의 순수했던 이상을 끝까지 지키는 종교지도자로 남았더라면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한 고귀한 이름으로 후세에 길이 남았으리라.
어쩌면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삼국지 전야의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는 터전을 마련해놓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삼국지를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군웅들이 거의 다 황건적의 난 때 힘을 기르고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